지금은 별도의 알람 없이도 이른 시간에 일어나지만, 한 때는 주말만 되면 기본 정오 이후에 일어나던 때가 있었다. 모두가 식사를 마치고 식탁을 정리할쯤 어기적거리며 일어나 볶음밥 혹은 라면으로 아점을 먹던 그 때. 아파트 단지 내 부지런한 사람들은 주말을 즐기러 일찍 나간 통에 생긴 일상의 여유로움과 나지막한 티비 소리가 주었던 편안함, 다시 누워 하릴 없이 빈둥거려도 될 것 같던 평화. 이런 환경들 덕분에 아점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데, 어쩌면 해외에서 시작된 브런치도 그런 느낌일지 모르겠다. 여러가지 음식들을 한 접시에 담아 커피와 함께 오랜 시간 즐기며 평일 내내 못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가족들과 함께하는 그런 여유. 대체로 분위기는 비슷해도, 메뉴는 조금 다를텐데 호주식 브런치는 빌즈가 잘한다고하니 한번 맡겨볼까요.
여기는 역삼역 근처에 있는 빌즈 강남. 이전에도 강남 매장과 잠실 매장을 몇번 드나든 적이 있었는데, 이 날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평일 이른 저녁이라 그런지 분위기가 좀 남달랐다. 빌즈 잠실은 (리뉴얼 전) 방문했을 때 통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엄청 강해서 약간 활달하고 쾌청한 느낌을 줬는데, 빌즈 강남은 건물 입구와 약간 떨어져있고 빌딩숲 사이에 있는 곳이라 그런지 따뜻한 조명 등으로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하려고 한 의도가 다분해보였다. 조금 많이 늦은 브런치이긴 하지만 여유로움을 느끼기엔 딱 적당한 느낌. 기분 좋게 대표 메뉴들을 주문해보았다.
오늘의 주문
풀 오지 (25,000원)
빌즈 카르보나라 파스타 (23,000원)
따뜻한 모카 (6,600원에 디카페인 옵션 500원 추가)
사악한 명성(?)답게 가격대가 만만치 않습니다만. 어쨌든 원 플레이트에 토스트, 베이컨, 소시지, 에그 오믈렛, 구운 토마토와 야채, 버섯이 가득 담긴 풀 오지는 보기만 해도 흐뭇한 양과 비주얼을 자랑한다. 솔직히 말하면 전반적인 구성 요소들이 대단히 특별한 맛은 아닌데 베이컨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얇은 베이컨이 아닌 통 삼겹 베이컨이라 식감이나 맛에 있어서 우위를 자랑한다. 투박하게 구워낸 빵 위에 둔탁하게 올라간 버터의 느낌도 좋고. 다만 이것저것 즐기면서 먹기엔 뻑뻑한 느낌이 들어서 야채 양을 좀 늘려줬으면 하는 바람. 아침부터 이렇게 먹으면 고혈압 걸리지 않겠냐고요. 다음은 빌즈의 대표 메뉴로 손꼽힌다는 카르보나라 파스타. 풀 오지에서 인상 깊었던 베이컨이 깍뚝썰기로 푸짐하게 들어가있는 게 마음에 든다. 파스타치고는 면이 얇은 편인데, 생 노른자를 올린 정통 카르보나라 스타일이라 이 얇은 면이 꾸덕한 소스와 간을 즐기기에 더 적합한 느낌이다. 다소 짭짤한 편이라 단일 메뉴로 즐기기엔 부담스러운 느낌이 좀 있다. 카페 모카는 따뜻한 디카페인 커피로 주문했는데, 별 기대 없이 주문한 것치고 아주 만족스러웠다! 많이 달지도 않고 적당히 쌉싸래하고 풍미가 있는게 오히려 커피 맛집이라고 소문나지 않은 게 놀라울 정도!
이렇게 위에서 먹은 메뉴 외에 사실 내가 진짜 추천하고 싶은 메뉴는 따로 있었는데.. 이미 단종 됐다는 슬픈 이야기. 위의 메뉴는 빌즈 잠실에 방문했을 당시 먹은 오리 스테이크인데 이게 정말 맛있었는데... 부들부들하고 촉촉한 오리 살이 금귤과 함께 먹으면 정말 눈이 질끈 감길 정도로 맛있었는데 왜 단종을 시켰을까.. 왜....흑흑.
갈까요, 말까요?
분위기 생각하면 yes, 맛만 생각하면 애매
저 오리 스테이크가 아직 있었다면 백번이라도 가서 드시라고 했겠지만 다른 메뉴들을 생각해보면 '맛'만 보고 빌즈에 가라고 말씀 드리긴 애매하다. 뭔가.. 그냥 다른데 가서도 충분히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맛이 난다. 그렇다고 맛이 없는 것도 아닌데 딱히 빌즈 아니면 안되는 그런 특색 있는 맛은 없다고 해야할까. 반면 분위기만 본다면 가라고 말씀 드리겠다. 이건 내 개인적인 낭만 같은 건데, 빌즈 강남에 방문했던 비 오는 날의 분위기를 떠올리면 항상 영화 "캐롤"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어스름한 저녁에 따뜻하고 고전적인 조명 아래 두런두런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 소리와 포근하고 기분 좋은 커피 맛, 소파와 테이블 사이를 지나다니는 조용한 서버들.. 그런 분위기를 느끼고 싶으시다면 방문해보셔도 좋을 듯. 다만 주말은 안되고 애매한 평일 시간대에 방문하시는 걸 꼭 추천 드려요.
위치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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